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악의 문제 (문단 편집) === 우리 세상이 그나마 가장 좋은 세상이다 === >신의론(神義論)이라고도 번역되는 이 단어의 어원은 그리스어의 theos(神)와 dike(義)이며 '신의 의로움'이라는 뜻을 갖고 있으며, 세상에 존재하는 악으로 인해 생겨나는 신에 대한 불신을 해소하려는 주장을 가리키는 말이다. 변신론에서 연구의 주요한 초점은 “우주에 명백히 존재하고 있는 악의 실재에도 불구하고 신의 선(善)과 섭리를 어떻게 입증할 수 있는가”이다. 그래서 오래 전부터 악의 기원과 의미에 대해서 많은 철학자와 신학자들이 숙고해 왔다. > >페르시아 종교와 같은 이원론에서는 세계란 선과 악이 서로 투쟁하는 전쟁터이고, 결국에는 선이 승리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일신교의 경우에는 신의 전능과 사랑이 현세의 악과 정면으로 충돌하기 때문에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다. 오리게네스는 악의 존재를 피조물이 자유를 남용한 죄의 결과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계몽주의시대의 회의주의자 베일(P. Bayle, 1647-1706)은 매력적인 변증법을 사용하여 악이 실재한다는 사실과 신은 결코 양립할 수 없다고 주장, 격론을 불러일으켰다. 라이프니츠(C.W. Leibniz)는 그의 저서 ≪변신론≫(Essais de Theodicee, 1710)에서 이에 답하여 현실의 세계는 가능한 한 최고선의 세계이고, 회화(繪畵)에서 그림자가 전체의 미와 조화를 산뜻하게 부각시키기 위해 필요한 것처럼, 가시적인 악은 보다 높은 목적을 수행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인정된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 그의 극단적인 낙관론을 피력하였다. 이렇게 변신론이란 단어는 라이프니츠에 의해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 >근대에 들어오자 자연적인 악과 마찬가지로 사회적인 악이 크게 부각되면서 '''변신론은 신학적인 중심논제의 위치에서 밀려났다.''' 즉 사회악이 신의 사랑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근대신학은 사회적 실천을 강조하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는 노력을 통해서만 신의 사랑과 섭리가 관철될 수 있음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특히 1, 2차 세계대전은 인간성에 대한 낙관적인 견해를 뿌리째 뽑아 버렸기 때문에 인간생활에 존재하는 악의 실재와 신의 사랑에 대한 문제가 논쟁의 촛점이 되었다. 이제 변신론은 이 문제의 중대성에 밀려 더 이상 논급되지 않는다.''' 다만 신에 대한 형이상학의 한 부분적 학문인 자연신학(natural theology) 속에서 언급될 뿐이다. >---- >'''가톨릭 대사전, <변신론> 항목 中''' 독일의 철학자 [[고트프리트 폰 라이프니츠]]는 근대 합리론자의 입장에서 악의 문제를 다루면서 변신론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했다. 이것은 악이 존재하기 때문에 신이 완벽하지 않다는 주장, 그리고 신이 왜 인간을 완벽하지 않으며 악한 존재로 만들었느냐는 공격에 대하여 신의 권능과 선함을 변호하려는 이론이다. 간단하게 말하면 결국 신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었고 그 때문에 인간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선택하고 욕망 대로 선택하게 되었고 결국 이러한 인간의 선택에 악은 부가적으로 따라오게 되는 것이며 악이 단순히 나쁜 것만이 아니라 뒤에 따라오는 행복과 선을 조금 더 극대화시켜주는 역할까지 하며 세계를 최선의 형태로 만든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악은 음악으로 비유하자면 순간의 불협화음적 요소로써 오히려 음악을 더욱 아름답게 하는 존재이다.[* 이 견해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톨킨]]의 견해와도 비슷한 면이 있다. 톨킨은 그의 저서 [[실마릴리온]]과 [[반지의 제왕]]을 통해 악(惡)까지도 [[일루바타르]]의 계획이며 결국에는 선(善)의 도구가 된다는 견해를 묘사했다. 일루바타르의 거대한 음악 작업에 그의 창조물인 [[멜코르]]가 자신의 뜻대로 불협화음을 만들었지만 결국 그것이 음악을 더 아름답게 만들었고 이것 또한 일루바타르의 뜻이었다는 것이다.] 유한한 존재에게는 아무리 선을 행하려 한다 해도 그 선 때문에 누군가 피해 보거나 고통 받는 악이 뒤따르게 되며 인간은 악을 선택하기도 한다. 하지만 의지가 있는 세상이 오히려 의지가 없는 세상보다 최선의 세상이며, 결과적으로 악도 하나의 선을 실행할 수 있는 방편이며, 결국 선이 존재하기에 악이 존재할 수 있으며 그렇기에 악은 결국 신의 의지에 반하는 것이 아니라는 내용이다. 사실 다른 사람도 아닌 라이프니츠가 이런 주장을 한 근본적인 이유는, 본인이 18세기의 과학자이자 신학자로서 근대 [[과학]]과 [[기독교]] 신앙을 결합시킬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라이프니츠는 근대 자연과학의 [[기계론]]적이고 결정론적인 세계관을 수용하여 우주 자체를 신이 창조한 하나의 거대한 기계로 보았다. 그런데 이런 우주의 법칙성과 인과성을 유지하는 범위 안에서는 신이라고 할지라도 마음대로 선을 창조하거나 악을 없앨 수 없고, 부분적으로 악을 이용해서 선을 추구할 수 밖에 없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그의 철학에 나오는 예정조화설, 단자론, 충족이유율 등의 어려운 개념들도 모두 당시의 합리주의와 종교를 매개하기 위한 목적이 바탕에 있다. 물론, 이것은 결국 신의 전능을 제약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므로 기독교에서 정론으로 받아들이기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라이프니츠는 이러한 제약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모든 것들이 더 나은 방향으로 진보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철학사에서 [[낙관주의]]의 대명사로 불린다. 사실 이런 낙관적 믿음이 근대 유럽인들에게는 일반적인 것에 가까웠다. 하지만 이러한 낙관론은 라이프니츠 사후에 일어난 [[리스본 대지진]]과 같은 재앙으로 인해 강력한 타격을 입게 되었다. [[프랑스]]의 계몽주의자 [[볼테르]]는 자신의 소설 《[[캉디드|캉디드(Candide)]]》에서 라이프니츠의 주장을 풍자했는데, 이 소설의 주인공 팡글로스 박사는 온갖 불행을 겪지만(위의 포르투갈 대지진도 경험한다.) 자신이 그래도 가장 행복하다고 착각하면서 살고 있다. 애초에 신에 비하면 지성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 인간조차 더 나은 세계를 상상할 수 있고 그것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신이라는 존재가 그런 세계를 상정하지 못한다는 게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현실에선 한낱 인간들조차 [[법]]을 만들고 치안을 확립하며, [[도덕]]과 [[윤리]]를 교육하여 [[사회]]를 보다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그 중 상당수는 실제로 유효하게 작동하고 있다. 인간도 할 수 있는 일을 전지전능한 신이 못한다는 것인가? 인간 사회의 변화는 지금 이 세상이 완성형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결국 이 주장은 자체로 신의 전지전능함을 부정하는 셈이다. 그리고 신이 악으로 가득찬 세상에 인간을 내던지고 인간이 악전고투하며 문제를 해결하도록 내버려둔다면, 인간은 무엇 때문에 신을 섬겨야 하는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인간에게 '선한 의지'로 '악한 상황'을 초래하게 하는 신이 과연 숭배할 가치가 있는가? 라이프니츠의 논리가 오늘날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은 단순히 볼테르가 편협하다거나 라이프니츠의 사고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현대의 기준으로 볼 때 논리 수준이 빈약하여 수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당장 현재 신실한 신학자들조차 라이프니츠의 논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만 봐도 이 사실은 자명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